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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갈피

by 땔나무 201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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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09.

 

[86-87쪽]

  그것은 침공 후 일곱 번째 날이었고, 그 당시 저항 세력의 대변인으로 변한 한 일간지 편집실에서 그녀는 이 연설을 들었다. 그 방에서 두브체크의 연설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증오했다. 그가 양보했던 타협안에 대해 그를 원망했고 그의 모욕 때문에 모욕감을 느꼈으며 그의 허약함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지금 취리히에서 그 순간을 생각하니 그녀는 두브체크에 대해 더 이상 어떤 경멸감도 느끼지 않았다. 허약함이란 단어도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두브체크처럼 운동 선수의 체격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자기보다 우세한 위력을 대하면 항상 허약해지는 법이다. 당시에는 참을 수 없었고 역겨웠던 이 허약함, 또한 자신의 나라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 이 허약함에 대해 그녀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녀는 약한 사람들의 편, 약한 사람들의 진영, 약한 사람들의 나라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녀는 그들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고 연설중에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현기증에 끌리듯 이런 허약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녀는 자신도 허약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녀는 다시 질투에 빠졌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토마스가 이를 눈치채고 평소에 하던 동작을 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꼭 눌러주었다. 그녀가 손을 꼽았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을 위해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야?

당신이 늙어 있길 바라요.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당신이 약하길 바라요, 당신도 나처럼 약하길 바라요였다.

 

 

 

[89-90쪽]

  그러던 닷새 만에 토마스가 불쑥 아파트에 나타났다. 카레닌이 그의 얼굴까지 뛰어올랐고 덕분에 서로 말을 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으로부터 그들을 한동안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눈 덮인 들판 한가운데 마주 서서 추위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마치 아직 키스를 하지 않은 연인들처럼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가 물었다:잘 돼가?

신문사에는 들렀어?

전화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요. 기다리는 중이에요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261-263쪽]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두 사람 중 누구도 꽉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은 침묵 속에서 식사를 했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이 마치 불운 같았다.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묵직해져 갔다.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그는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깨웠다.

  그녀가 말했다:내가 땅에 묻혀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당신은 일주일에 한 번만 나를 보러 왔어요. 당신이 지하 무덤의 문을 두드리면 내가 나갔지요. 내 눈 속에는 흙이 가득했어요.

  당신이 말했어요: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군>이라고 하더니 내 눈에서 흙을 떼어주었어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지요:어쨌거나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눈 대신 그 자리에 구멍만 있어요>

  그러고 나서 당신은 오랫동안 떠나 있었는데, 나는 당신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몇 주가 흘러도 당신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지 못할까 두려워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했어요. 어느 날 드디어 당신은 돌아와서 지하실 문을 두드렸는데, 나는 한 달 내내 잠을 자지 못해 너무 탈진해서 겨우 계단을 올라갈 힘만 남아 있었죠. 드디어 문을 열자 당신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어요. 내 안색이 나쁘다고 했어요. 내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죠. 뺨은 움푹 패이고 두서없이 허둥거리기만 했지요.

  나는 당신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지요:용서해 주세요. 요새 나는 전혀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은 위로하는 듯한 말투지만 공허하게 들리는 말을 했어요:그것 봐, 당신은 좀 쉬어야 해. 한 달 동안 휴가를 가져야만 해.

  나는 당신이 휴가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요! 당신이 한 달 동안 날 보지 않고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지요. 왜냐하면 다른 여자와 함께 지낼 것이기 때문이죠. 당신은 떠났고, 나는 다시 무덤 속으로 내려왔지요. 나는 또다시 한 달 동안 당신을 마중 나가기 위해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고, 한 달 후 당신이 돌아올 때면 더욱 흉한 몰골이 될 테고, 그러면 당신이 더욱 실망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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